산골 십 남매 이야기

코람데오닷컴, 기사상세페이지, 열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며 가정을 천국으로 – http://m.kscoramdeo.com/news/articleView.html?idxno=2848

요즘 시골에서는 어린아이 울음소리를 듣기가 어렵다. 젊은이들이 좋은 직장과 좀 더 나은 생활환경을 찾아 다들 도시로 떠나 버렸기 때문이다. 영화 ‘워낭소리’에서 익히 본 것처럼 우리네 농어촌을 지키는 건 힘없는 노인들뿐이다. 

그런데 젊은 시절 스스로 산골 마을을 찾아 들어가 노인들과 더불어 살면서 18년 동안 7남 3녀 열 명의 자녀를 낳아 키우는 다산(多産) 부부가 있다. 충북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에 사는 권학도(58) 목사와 부인 이재순(49) 씨가 바로 그들이다. 

이들 부부는 18년 전 숯 굽는 마을로 유명한 대문리 산골에 터전을 잡고 대문리교회를 세웠다. 목회를 하면서 거의 한 해 걸러 한 명씩 아기를 낳아 좀처럼 아기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산골에 해마다 아기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게 만들었다. 맏이 은진이는 올해 고3 수험생이고, 막내 선찬이는 올해 봄에 태어난 갓난아기다. 

권 목사 부부는 처음 만날 때부터 남달랐다. 선을 본 자리에서 권 목사는 세 가지 결혼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어머니를 모시고 살 것, 둘째 농촌으로 내려가 살 것, 셋째 아이는 낳을 수 있는 데까지 낳을 것. 이런 황당한 결혼 조건을 들은 이재순 씨는 웃으면서 이를 받아들였다. 그녀 또한 특이하게도 고생을 많이 해본 남자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부부의 자녀 출산과 육아, 교육 등 산골 마을에서 목회하며 살아온 수많은 일화가 고스란히 담겨 나온 책이 바로 다. 책 속에는 열 명의 자녀를 모두 자연분만으로 낳아 모유 수유로 키워 반듯하고 건강하게 성장시킨 엄마 이재순 씨의 눈물겨운 모성애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열 아이를 키우면서 시골 교회 목회자로 어려운 생활을 이끌어 온 아빠 권학도 목사의 숭고한 부성애가 진솔하게 녹아 흐른다.

          

▲ 부부는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자기 자신보다는 이웃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열 명이나 되는 많은 아이를 넉넉하지도 않은 산골에 살면서 어떻게 먹이고 입히고 가르쳤을까? 이들 부부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가지게 되는 당연한 의문이다. 이 부부의 독특한 자녀 교육 십계명을 들으면 이런 의문은 자연스럽게 해소된다. 

첫째, 공부보다 신앙이 먼저다. 둘째, 공부는 평일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하되 주일에는 하지 않는다. 셋째, 유치원이나 학원을 보내지 않고, 과외를 시키지 않는다. 넷째, 누구든 피아노는 칠 줄 알아야 한다. 다섯째, 우리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노는 것은 언제든지 환영이지만 다른 친구네 가서 노는 것은 가급적 피하도록 한다. 여섯째, 컴퓨터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 준 한계 영역 안에서만 사용한다. 일곱째, 한 사람의 인격과 정신은 그 사람의 태도나 외모에서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언제나 용모를 단정하게 한다. 여덟째, 책을 많이 읽는 아이가 되도록 한다. 아홉째, 아이들이 잘했을 땐 꼭 상을 주고, 잘못을 했을 땐 반드시 그에 상응한 벌을 준다. 열째, 나중에 어른이 되어 뭘 하면서 살아가든지 오직 주님 가신 길을 따라 주님을 위해 살도록 가르친다. 

이들 부부는 자녀들이 공부 잘해서 일류 대학을 가고, 좋은 회사 취직해서 돈을 많이 벌고, 출세하고 성공해서 잘 먹고 잘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자기 자신보다는 이웃과 사회와 국가, 그리고 인류를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이런 교육 철학을 그대로 반영하듯 온 가족이 사용하는 화장실 안쪽 문에는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이 적혀 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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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참된 동기는 무엇인가

역대상 28:9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

http://mw.godpeople.com/?GO=theme_view&t_no=24470

성경에서는 ‘마음’이라는 단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마음이라는 단어를 접하게 되면 우리는 감정 혹은 정성 같은 영역을 떠올린다.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구약에서 마음이나 심장을 뜻하는 히브리어 ‘레브’(Lev) 또는 ‘레바브’(Levav)라는 단어는 그러한 의미가 아니다. 원어와 의미적으로 가장 가까운 단어를 우리말에서 찾는다면 ‘동기, 중심’이라는 단어이다. 모든 사람은 이러한 동기에 의해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한다. 

그래서 잠언에서는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동기)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삶의 모든 것이 동기에서 발생하는 것이니 주님 앞에서 동기를 바르게 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면 보이는 교회에만 속해 있는 교인들 즉, 종교의 사람들의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두려움과 복을 받기 위한 갈급함이라고 할 수 있다. 

종교의 법칙은 벌을 면하고 복을 받기 위해 작동된다.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벌을 받고, 거절당하며, 이미 얻은 복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선을 행한다. 혹은 복을 받고, 인정받으며, 허무한 인생에서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탈출하기 위해, 또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자신이 선택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이다.

가까운 예로, 물질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고 있지는 않은가? 사업이 망할까 봐, 사업적인 축복을 받기 위해 주일성수를 하고 있지는 않은가? 구제라는 이름으로 봉사를 하거나, 선교지로 나가거나, 혹은 사역자로 살면서 “나는 그래도 괜찮은 사람이야. 나는 의미 있는 인생을 살고 있어”라고 인생의 허무함을 위로하고 있다면, 주님 앞에서 ‘나의 참된 동기는 무엇인가’를 점검해봐야 한다. 

그러면 보이지 않는 교회에 속해 있는 성도 즉, 복음의 사람들의 동기는 무엇인가? 이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은 자들이다. 이미 인정받고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를 해결받은 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헌신하고, 봉사하며, 생명을 걸고 선교지로 떠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얻기 위해서이다. 

복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한 방법론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잃는다고 해도 예수님을 얻기 위한 동기로 살아나가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 삶의 궁극적인 목적 그 자체가 되는 것이다. 

진정 복음의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순종하지 않는다. 이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기에 말씀을 따라 살기로 선택한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복음의 사람의 삶의 동기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 구원의 역사를 십자가에서 이루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흠모하는 것이다. 즉 자신이 발견한 그 아름다움을 더 소유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기쁨으로 버리고, 내려놓으며, 포기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나는 왜 순종하고 있는가? 왜 섬기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가? 내 안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동기는 나 자신도 가려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다윗은 끊임없이 신음하며 자신의 동기를 살피지 않았던가?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동기)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시 139:23) 

내 동기의 참된 정체를 나조차도 가려내기 힘들지만 주님께서 내 인생을 흔드셔서, 영원하지 못한 것은 다 날아가게 하시고, 오직 영원한 예수 그리스도만 남게 해주시기를 소원한다.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자리잡은 찌꺼기 같은 동기를 하나님의 비수로 도려내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이 엄습할지라도 최고의 아름다움의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를 소망한다면, 그 정도 아픔쯤은 자청하자.

-이기는자- 다니엘김

† 말씀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마음을 감찰하시느니라 – 잠언 21장 2절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요한복음 17장 3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 신명기 6장 5절

† 기도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한 분 만을 사랑합니다.
매 순간 진실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소서.

† 적용과 결단
영원하지 못한 것들은 다 없어지게 하시고 내 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남게 하시기를 기도하며 결단해보세요.

주님의 완벽한 타이밍

시편 138:6 여호와께서는 높이 계셔도 낮은 자를 굽어살피시며 멀리서도 교만한 자를 아심이니이다

주여, 시간을 초월해 계신 주님을 생각할 때 저는 경외심에 사로잡힙니다. 주님은 영원한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까지 동시에 보실 수 있습니다. 시간이 주님을 속박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시간의 주관자이십니다. 이 땅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주님의 완벽한 뜻에 따라 조정하십니다. 주님에게는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은 일이 없습니다.
성경을 돌아보면서, 주의 도우심을 필요로 하는 주의 백성을 주께서 늘 적절한 때에 돌보신다는 사실을 저는 거듭 발견합니다. 장래에 관한 염려에 휩싸일 때마다 이 사실로 인해 확신을 얻기 원합니다. 완벽한 시점에 임할 주의 손길을 편안한 마음으로 기다리도록 도와주소서. 저는 내일에 관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미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 1분 찬양 –

하나님의 모략. 감사하기

하나님의 모략.
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에 하나님의 주재를 생각하며 감사하는게 여간 힘들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가 자기 중심적이고 교만하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합니다.
In Him, we trust.
모든 일 위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나에게 선하신 분이라는 것
그래서 지금 내게 일어나는 일들이 보기와 다르게 선한 길이란 것
그것을 믿어야겠습니다.

하나님의 모략을 보는 방법

http://nomad2012.egloos.com/m/1198249

바벨론이 망하고 페르시아가 바벨론의 중앙집중 정책을 버리고 지방분산 정책을 폈다고한다. 그래서 유대인들의 포로귀환이 일어났고, 성전재건과 유대공동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예레미야선지자의 예언이 이미 있었던 일인데, 페르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세수확보를 위한 정책이었다고 한다. 

흑암의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역사가 이런 양상이다. 예수님께서 거라사 지방에서 귀신을 쫓아내셨다. 거라사 지방에 가신 것은 당시 헤롯왕이 예수님을 잡으려고했기 때문에 피해서 가셨다고 한다. 

같은 일이지만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느냐, 사람을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과 보여지는 단면이 전혀 달라진다. 

개인의 인생도 그렇다. 취업이 더뎌지거나, 어떤 일에서 성공을 하거나, 만남을 가지거나 이별을 하거나, 부자가 되거나 가난해지거나… 모든 일에서 사람을 중심으로보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그렇다. ‘중심’의 싸움이 그렇게 치열하다. 무엇을 중심으로 보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과 열매가 극단적으로 달라진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본다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약속을 모든 생각과 판단의 출발점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나를 중심으로 보면 나의 이성이 활성화 된다. 나의 경험, 판단, 감정이 절대적 요소로 작용한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 된다. 이것은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매우 자연스럽고 익숙하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보면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이 활성화된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내 안에 예수님께서 활성화되는 일에 굴욕감 내지 패배감을 가진다. 죄가 주는 끄을음이다. 이것을 영광과 기쁨으로 여기는 것이 성령하나님으로 충만한 상태이다. 그래서 그 살아있는 말씀이 나의 영과 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주님의 말씀에 복종하게 한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볼 때 복잡한 일상과 세상의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말씀이 일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실체, 우리의 영적 리얼리티, 그리고 신앙의

예수님의 실체, 우리의 영적 리얼리티, 그리고 신앙의 인티그리티
http://nomad2012.egloos.com/m/1198013

정의를 외치며, 피해 입은 사람들의 상처를 들먹이며 옳은 체 하던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말이 서로 전혀 통하지 않았는데,
자신도 모르게 자기 의를 붙드는 교만함이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