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戰場의 맥아더는 몰랐다… 트루먼 대통령의 政治的 목적을” [88세에도 대학 강의하는 ‘군사학 代父’ 이종학 선생]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6/19/2016061901842.html

[88세에도 대학 강의하는 ‘군사학 代父’ 이종학 선생]

“1947년 美 대통령 특사로 온 웨드마이어 장군의 보고서

‘한국군 증강과 美軍 주둔…’ 묵살·발표 금지됐다”

“6·25 전날인 24일 밤, 군 수뇌부 2차 술자리까지…

북한군 밀고 내려왔을 땐 대부분 곯아떨어져 있었다”

이종학 선생은 직접 차를 몰고 신경주역으로 마중을 나왔다. 88세 노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니 미안하면서 걱정도 됐지만, 그는 이렇게 안심시켰다.

“나는 1957년부터 운전을 했습니다. 지금도 충남대에 2주에 한 번 강의를 갈 때마다 역까지 차를 몰고와 KTX를 타고 갑니다.”

이종학 선생은

이종학 선생은 “전쟁은 나라의 생사와 존망과 관계되니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경주 외곽에 있는 한옥 살림집에 도착하니 ‘서라벌군사연구소’ 현판이 붙어 있었다. ‘연구소’라고 해봐야 그 혼자다. 하지만 그는 한국 군사학계의 대부(代父)다. 국내에서 처음 ‘전쟁론’을 가르쳤고, 군사학 이론 체계를 정립했다. 문교부가 승인한 첫 군사학 정교수(1980년)라는 타이틀도 있다. 그의 역할로 현재 10여개의 대학교에 군사학부가 개설돼 있고, 29명의 박사도 배출됐다.

“학창 시절 ‘퀴리부인’ 전기를 읽고는 화학자 꿈을 키웠습니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면서 공군사관학교(3기·1951년)에 입학했지요. 생도 3학년이었을 때 ‘직업 군인은 사람을 죽이는 게 본업이 아닌가’ 하는 회의가 생겼습니다. 신경쇠약으로 마산공군병원에 입원했어요. 넉달간 병원 생활을 하고 돌아왔어요. 용케 졸업과 임관은 했습니다.”

그는 통신장교로 근무하다, 대위 때 공사 교관으로 발령났다.

“학생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때 처음 ‘손자병법’을 읽었고 첫 구절이 나를 감동시켰습니다. ‘전쟁이란 나라의 중대한 일이다. 생사존망과 관계되니 깊이 연구해야 한다(兵者國之大事 死生之地 存亡之道 不可不察也)’라고 했어요.”

―왜 감동을 느꼈습니까?

“전쟁을 단순히 사람을 죽이는 학살의 개념으로만 알았던 내게 ‘전쟁은 국가의 대사(大事)로 깊이 연구해야 한다’고 했으니까요. 클라우제비츠(1780~1831년·프로이센 전략가)의 ‘전쟁론’에서도 큰 영감을 받았지요.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이다. 목표를 초과하는 전쟁은 더 이상 성공할 수 없는 무익한 노력일 뿐만 아니라 적의 반격을 유발하는 유해한 노력’이라고 했어요. 무조건 살상(殺傷)만이 전쟁의 목적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독학한 ‘손자병법’과 ‘전쟁론’을 번역해 교재로 썼어요.”

―’손자병법’이나 ‘전쟁론’은 교양 수준인데, 그 시절에는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대구 헌책방에서 우연히 클라우제비츠의 영어 번역본 ‘전쟁론(On war)’을 발견했어요(서재에서 갖고 나온 그 헌책에는 ‘1957년 7월 18일’ 구매 날짜가 적혀 있었다). 내가 미국보다 더 일찍 가르쳤던 셈입니다. 미국에서 생도들에게 ‘클라우제비츠’를 가르친 것은 베트남전(戰)에서 철수한 뒤였어요. ‘전투에서는 안 졌는데 왜 전쟁에서 졌을까’ 하는 반성에서 비롯됐습니다.”

―선생께서 강의를 할 때만 해도 국내에는 ‘군사학’ 개념이 전혀 없었습니까?

“총 쏘는 사격이나 군사훈련만 했지, 군사학은 전혀 몰랐고 교수진도 없었어요.”

―군사학은 무얼 가르치는 겁니까?

“우선 ‘전쟁이란 무엇인가’ 하는 전쟁의 본질이지요. 그리고 어떻게 싸워 이기느냐와 관련된 전략·전술이지요. 또 과거에 있었던 전쟁사(史)를 가르칩니다.”

―한마디로 군사학은 과거 전쟁 사례 연구를 통해 얻어진 지식 체계라고 정의하면 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과거의 어떤 전쟁을 가장 많이 연구했습니까?

“당연히 6·25전쟁이지요.”

―군사학 관점에서 6·25를 접근할 때 어떤 대목이 가장 흥미롭습니까?

“한때 시끄러웠던 ‘누가 일으켰느냐, 북침이냐 남침이냐’ 논쟁은 소련의 비밀문서가 해제되면서 규명이 됐습니다. 내가 흥미를 갖고 있는 대목은 ‘6·25가 왜 일어났느냐?’는 겁니다.”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赤化) 야욕 때문이라는 게, 상식 아닌가요?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런 야욕이 있어도 남한의 군사력이 대등했다면 쉽게 전쟁을 일으킬 수 없었고, 전쟁이 그렇게 확대되지 않았을 겁니다. 1947년 트루먼 미(美) 대통령의 특사로 한국을 방문한 웨드마이어 장군이 ‘북한군에 비해 남한 군대가 너무 약하다. 빨리 증강해야 하고 미군은 당분간 주둔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이 보고서는 묵살됐고 발표 금지가 됐습니다.”

그는 서재에서 자신이 번역한 ‘웨드마이어 회고록’을 들고 왔다. 웨드마이어(1897 ~1989)는 제 2차 대전에서 ‘승리 계획’을 수립한 미 육군참모본부의 전략가였다. 미국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병력, 화물 수송용 선박, 항공기, 훈련 시설은 얼마나 필요하고 어떻게 동원할지 등의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중국 방면의 미군사령관 겸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참모장을 역임한 뒤 대장으로 예편했다. 그가 미 군사전략의 이면(裏面)을 담은 ‘웨드마이어는 보고한다(Wedemeyer reports!)’를 출간한 것은 1958년이다.

“이 책의 존재를 알고 1970년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가 서명을 해 보내주었고 번역 출판도 허락했어요. 하지만 국내 여건을 고려해 그동안 번역을 미뤘다가 2년 전 출간했습니다. 이 책에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올린 보고서가 그때 왜 묵살됐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습니다. 다만 6·25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무익한 전쟁(bloody, futile Korean war)’이라고만 썼습니다.”

―이는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겁니까?

“미국 정부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던 한국전쟁을 막지 않아 불필요하게 숱한 미군들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뜻입니다. 웨드마이어 장군은 그때 자신이 군복을 벗고서라도 보고서를 공개 못한 것에 대해 ‘중대한 과오를 범했고 국가에 대한 의무에 태만했다’고 후회했습니다.”

88세에도 대학 강의하는 ‘군사학 代父’ 이종학 선생(오른쪽)

―모든 보고서가 채택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아예 보고서 공개를 금지시켰습니다. 그 뒤 이승만 대통령이 ‘한반도의 공산주의 위협은 미국의 점령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군사 원조를 요청했으나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진해를 미 해군기지로 제공하겠다’는 제안도 안 받아들였습니다. 1949년 미군을 철수시켰고, 곧이어 ‘애치슨 라인(한국과 대만은 미국의 방어선 밖에 있음)’이 선포됐습니다. 이것이 북한에 남침 빌미를 제공해준 겁니다.”

―트루먼은 6·25가 발발하자 즉각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그게 우리를 구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고 신속하게 전쟁에 개입했습니다. 그전까지의 자세와는 확연히 다릅니다. 이 때문에 ‘트루먼이 6·25에서 달성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무엇이었을까’를 연구하게 됐습니다.”

―트루먼 회고록에는 ‘한반도가 공산 세력의 수중에 떨어지는 걸 방치하면 미국과 가까운 나라들까지 계속 유린될 것’이라고 나옵니다. 공산 세력으로부터 민주 진영을 지키겠다는 트루먼의 정의감(正義感),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과 다른 게 있습니까?

“맥아더 장군의 회고록에는 ‘나는 이기기 위해 전쟁을 수행했지만 한국전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진행됐다’고 나옵니다. 중공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한 맥아더의 만주 폭격 등은 트루먼 정부에 의해 제동이 걸렸습니다. 맥아더는 ‘사령관이 병사의 생명을 지키고 부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전투력을 사용하는 걸 금지당한 경우는 미국 전쟁사에서 유례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건 맥아더의 입장이고, 오히려 제3차 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막은 트루먼이 옳았다는 게 주류 견해입니다.

“바로 그 점입니다. 맥아더가 트루먼의 정치적 목적을 몰랐던 겁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공산 세력 축출이 목표가 아니었고, 현상 유지를 하는 ‘제한 전쟁(limited war)’에 목표를 뒀던 겁니다.”

―트루먼의 정치적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2차 대전이 끝난 뒤 전쟁에 동원됐던 병사들은 대부분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미군은 거의 해체되다시피 했습니다. 하지만 세계 평화가 이뤄진 게 아니라 ‘소련’이라는 더 막강한 적(敵)이 나타났습니다. 미국 내 분위기로는 군대와 군사예산 확충, 방위 산업 육성을 꺼낼 수가 없었습니다. 트루먼에게는 군사력 증강을 위한 카드가 필요했습니다. 한반도에서 제한 전쟁을 원했을 겁니다.”

―트루먼이 미국 국익을 위해 한국전쟁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이건 ‘음모론적 시각’인데요.

“오해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사실에 근거한 내 가설이니 동의 여부는 다른 문제입니다.”

―또 어떤 점에 흥미를 갖고 있습니까?

“왜 국군이 초반에 완패를 당했느냐는 겁니다. 사흘 만에 서울이 점령됐지 않았습니까. 당시 5~6월 전쟁 위기설이 파다했고, 구체적 정보가 보고됐습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군 수뇌부에서 일어났습니다.”

6·25 직전의 미스터리한 점을 요약하면 이렇다. ①6월 10일 군 수뇌부의 대규모 인사이동으로 대부분 사단장이 부대를 장악할 시간을 갖지 못했다. ②6월 11일 발동한 비상경계령을 23일 24시를 기해 해제했다. ③6월 24일 38선 근무 병력의 3분의 1을 휴가 보냈고, 나머지 병사들도 외출·외박시켰다. ④6월 24일 저녁에는 육군장교구락부 개관 축하 파티를 열어 총참모장(채병덕) 이하 군 수뇌부와 전국 주요 지휘관이 밤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다음 날 북한군이 38선을 밀고 내려왔을 때 대부분 곯아떨어져 있었다.

“당시 파티는 2차로 국일관에 가서 새벽 두시까지 계속됐어요. 술값을 연합신문 주필 정국은(鄭國殷)이 냈습니다. 그는 휴전협정 직후 간첩 혐의로 체포돼 여섯 달 만에 1954년 초 사형당했어요. 문제는 그의 재판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겁니다. 군내 어느 세력이 말소한 겁니다.”

―이는 무슨 뜻을 담고 있는 겁니까?

“6·25 당시 군 수뇌부에서도 북한과 결탁했거나 조종을 받은 이들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종학 선생은 군에서는 진급을 못 해 중령으로 예편했다. 1987년 국방대학원 교수직도 그만두고 경주로 내려올 때 그는 서울 집을 군사학발전기금으로 공사(空士)에 내놓았다. 2003년 군사학 석사 과정이 개설된 충남대에 군사학진흥기금으로 강원도 임야와 장서 1만권을 기증했다. 그는 역서 및 공저를 포함해 43권의 책을 썼다.

그는 “축구 경기처럼 인생은 후반전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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